색바랜 편지를 들고

아무도 아닙니다

비말 2025. 4. 8. 05:40

숙이 조모: 누고?
숙이: 아무도 아입미더, 숙입니다.

조모: 그으래, 아무도 아이네!
숙이: 예에, 맞십니더.

넌 누구냐-물어도 대답없는-나무 새순
넌 누구냐? 물어도 대답없는 나무 새순

 

어릴 때 우리 뒷집에 살던 숙이하고 그녀의 할머니가 부엌문과 안방을 사이에 두고 늘 오가던 말이었습니다. 숙이는 전설따라 삼천리 영화나 얘기속의 사연처럼 강보에 쌓인 체 그 집 대문간에서 줏어 길러졌다는.. 온 동네가 다 아는 비밀도 아닌 비밀입니다.

나보다 두 살 더 먹은 눈이 크고 까무짭짭하게 생긴 착하고 순하디 순한 아이였습니다. 당연히 언니뻘인데 그냥 이름을 부르며 그 집 누렁이 넘나드는 틈새로 둘이 오가며 온갖 요시락을 떨며 놀았던 비말이 어릴적 동무입니다.

고목나무에-새순을 움틔우고-파르르~
고목나무에 새순을 움틔우고, 파르르~

 

네살 터울의 여동생한테 시종처럼 부림을 당하면서도 늘 해맑게 웃던 그녀.. '숙아, 니는 성 낼줄도 모르나?' 하고 물을라치면 '어데~ 내 동생인데 어떻노!' 까무짭짭한 얼굴에 눈만 큰 그 애는 씨익 웃으면서 그리 말했습니다. 나 같으면 가만 않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저는 막내인가 봅니다.

비말뜨락 뽕나무 잎이-꽤 무성해지고
비말뜨락 뽕나무 잎이 꽤 무성해지고

 

그 후 서울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헤어졌다가 어느 가을 여름방학때 고향마을에서 열아홉 숙이가 뽀오얀 속살을 보이며 박꽃같이 하얗게 웃고 있는 아가에게 젖을 물리는 것을 보고.. 저는 그냥 퍼질러 앉아 울어버렸습니다. 아득한 기억과 함께 '누고? 아무도 아입미더!' 멀리 태양열에 물이 마르면서 스물스물 기어 오르는 아지랭이같은 기억을 다시 들춰냅니다.

짝꿍이 차려낸-커피-햄버그-카스테라
짝꿍이 차려낸, 커피, 햄버그, 카스테라

 

오늘은 뜬끔없이 그 숙이와 아이의 얼굴이 하얗게 피어난 카라꽃속에서 피어납니다. 색바랜 비말이 글방을 남의 방 기웃 거리듯 스치면서 '아무도 아닙니다, 비말입니다!' 갑자기 그러고 싶더라는..

색바랜 편지를 들고 선 비말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이 없어지는 시간속을 티 한잔의 여유도 없이 추억이라고 들춰냅니다. 밖에 나갔다 왔더니 온 몸맘이 절여놘 배추 이파리가 됩니다.

비말 飛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