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바랜 편지를 들고

Jury Duty 가는 길

비말 2025. 4. 13. 05:37

미국 캘리포니아의 경직된 봄이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켭니다. 아직 잠이 덜 깬양 졸린 눈으로 차창을 스치는 사월이 화들짝 놀래 눈물방울 속눈썹에 앉힌 체 가시 나폴대는 소나무 한 그루의 솔향을 맡습니다.

인터넷으로 챙기면서 올해는 그냥 좀 넘어갔으면 좋겠다며 매일 체크하다가 '내 복에 난리' 그러면서 포기를 합니다. 다른 해보다는 1시간여 늦게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고 느긋하게 새벽을 블방동에서 노닥거리다가 간단 도시락을 싸고 마호병에 뜨건물을 채워 길을 나선.. Jury Duty (배심원) 가는 길입니다.

소나무 한 그루-초록 담쟁이들과-봄꽃들
소나무 한 그루, 초록 담쟁이들과 봄꽃들

 

Jury Duty (배심원) 는 보통 12달이나 24달안에 걸리는 건데 40년 가까이 해도 여엉 편치않은 것 중의 하나입니다. 초창기에는 영어를 못한다고 빼기도 했는데 어느 날부터 그것도 먹히질 않고 바쁜 직장인들은 손해막심한.. 법원에 가서 해야하는 서비스이기도 합니다.

돌담을 감싼 담쟁이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밑에 소나무 한 그루, 여럿이 핀 봄꽃들이 하나되어 어우러집니다. 이름들이야 뭐가 됐던 '봄꽃 나무 한 그루' 4월이 만나게 해주는 봄입니다.

차창을 스치는 봄이-유채꽃으로 핍니다
차창을 스치는 봄이 유채꽃으로 핍니다

 

소국이니~ 철쭉이니~ 입에서 나오는 대로 갑론을박 해대다가 '유채꽃이다' 둘이 동시에 소릴 질러댑니다. 도로를 넘어선 들녘에 노랗게 펼쳐진 유채꽃밭이 아지랑이처럼 일렁댑니다. 운전대를 놓칠세라 손에 힘을 꽈악 주면서도 배둘레를 접어 넣으며 사진을 찍게 해주는 넘편이 이 때는 내 편이 됩니다. '사고나요, 괜찮아!' 하면서도 조수석의 마눌은 얼릉 한 두방 폰카를 눌러댑니다.

여럿이 피는 꽃들이 놀자는데-맘은 바쁘고
여럿이 피는 꽃들이 놀자는데 맘은 바쁘고

 

끝없이 펼쳐지는 담쟁이와 노랑꽃들과 드문드문 눈에 뜨는 연분홍꽃들이 이뿌지도 살갑게 다가서지도 않는데 혼자 용을 써대는 짝꿍이 안스러워 몇 캇더 찍어줍니다. 누구를 위한 블방질인지.. 색바랜 편지를 들고 선 두 노친네의 사월 아침이 분주합니다.

파란하늘 아래 물오른-초록이들이 이뿝니다
파란하늘 아래 물오른 초록이들이 이뿝니다

 

'우리 봄나들이 가는 거 아닌데..' 마눌의 살짝 속죽이는 소리에 '괜찮아, 아직 시간 넉넉해!' 속도 없는 넘편은 얼른 찍기나 하라면서 남의 출근길 도로변을 깜빡이 하나로 아예 내려 자동차를 세웁니다. '자기요, 우리 Jury Duty (배심원) 가는 길이야!'

금요일 봄소풍 나온 거라면 좋겠다면서 혼잣말을 하자 '그러게 빨리 끝내주면 좋을 텐데..' 맘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인지 짝꿍도 이미 날짜 받아놘 상태라 구차니즘이 발동 하나봅니다.

Jury Duty (배심원)-법원 (여긴 아니지만)
Jury Duty (배심원) 법원~ (여긴 아니지만)

 

그러든가 말던가 차창밖을 스치는 4월의 봄아침은 꽃잔치입니다. 오늘 법원가서 종일 모르는 사람들 틈에 낑가져 넋놓고 앉았을 생각하면 머리가 찌근대는데.. 봄햇살 내려앉은 도로변은 참으로 해맑고 이뿝니다.

도착하고 잠시 머무는 동안 안내방송에서 '오늘은 특별한 재판이 없다' 는 멘트와 함께 빠르면 점심전에 늦으면 오후 5시 이후에 집에 갈 수 있을 거라며 덤덤하게 말하는 소리에 벌써부터 등뼈가 아픈 것 같아 몸을 뒤척입니다. 스맛폰으로, 태블렛으로 느긋하게 자기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럽기만 합니다.

4월의 봄아침-봄꽃들을-사진으로 즐깁니다
4월의 봄아침 봄꽃들을 사진으로 즐깁니다

 

생각보다 일찍 파장을 하고 12시 전에 끝을 내고 나오면서 '우리도 이 만큼 늙었는데 그만 불렀으면 좋겠다' 고 둘이 입을 모읍니다. 갑자기 해방된 민족처럼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싸온 점심을 법원 주차장 자동차안에서 먹고 코스트를 가자고 둘이 합을 맞췁니다.

30년 전쯤에 판사가 '집에 가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은 손 들라고 해서 들었더니 '뭐냐?' 기에 '난 영어를 잘 못하고 머더 (Murder: 살인) 와 마더 (Mother: 엄마) 를 헷갈리기도 해서..' 라고 말했더니 '그게 헷갈리는 줄 알면 영어를 할 줄 아는 거니 그냥 남으라고 했던 그런 시간도 떠올려 봅니다.

비말 飛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