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짓는 여자

오리가족의 어느날

by 비말 2023. 4. 13.
320x100

만화방 풍경과 동네 구멍가게

몇 해전 봄에 동네 연못을 걷다가 만난 사진속 오리들을 보면서 꼬무락대는 게 날개짓도 아직 못하던 작은 새끼오리들을 떠올리며 엄한 생각에 빠져듭니다. 어린 날 아직 한글로 제 이름 석자도 깨우치지 못 하던 그런 때 일원짜리 동전 두닢을 들고 만화방으로 쪼르르 달려가던 날들을요. 동전 두개를 혹시라도 놓칠세라 손 안에 땀이 날 정도로 꼬옥쥐고 종종 걸음으로 달리다가 중국말도 잘 하는 영석이네 엄마가 컴컴한 구석 어딘가에서 내다보고 있을 구멍가게 앞에 멈춰서서 생각이 많아집니다.

애들아, 엄마 좀봐!

엄마는 일원에 두 개하는 하얀 돌사탕 사서 입에 넣고 이빨 다치니까 깨먹지말고 살살 빨면서 만화책 다 볼 때까지 먹어라셨는데.. 다른 과자도 눈에 들어와 마음을 어지럽 힙니다. 하얀 국사발같이 반지르르한 하얀돌사탕사서 하나는 입에 넣고 하나는 주머니에 넣고 오물거리면서 일원에 두권인 새로 나왔을 신간만화를 보면 되는데.. '지아가, 뭐하노 퍼뜩 안사고?'

저걸 어떻게 따라해? 근데 하더라고요!

너가 암만 생각이 많아봐야 집을 껀 뻔한데 뭘 망설이냐시는 듯 재촉을 하십니다. 아버지가 중국 화교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라시는 영석이 즈그옴마는 어릴 때 너무 귀하게 자라 조금만 아파도 온갖 약을 다 해먹여서 약 부작용에 한 다리를 잘 못써시 많이 절뚝거립니다. 그래도 동네 머스마들은 가끔 눈깔 사탕씩 하나씩 집어주는 영석이 엄마를 쩔뚝발이라고 놀리지는 않습니다.

배운대로 얼릉 해보겠다고 난리 부르스

'느그 옴마가 돌사탕 사 묵어라꼬 했제, 니는 할베네 만화방에 가는 길이고?' 귀신입니다. 컴컴한 안에서도 바깥에 서 있는 나를 다 보시고 내 마음까지 다 뚫어봅니다. '예에~ 돌사탕 주이소오!' 니가 꺼내 집으라며 위로 유리문을 들어주십니다. '옴마가 오늘은 얼매 주더노?' 알면서 물으십니다. '이원 줬십미더!' 사탕을 두 개 집어들고 돈 일원을 드리자 가까이 다가 오라시더니 아까 잠깐 망설이던 과자를 손에 잡혀주십니다. '애들 주지말고 니혼자서 다 묵거라!' 그러시면서.. 잠깐 망설이자 '왜, 느그옴마가 없어서 그러나?' 괜찮다시며 어야 갖고 가라고 하십니다. 어릴 때는 숫기가 없어 누가 주는 것도 얼릉 못 받고 (않받고) 엄마나 언니가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도 된다면 그 때서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사람보다 말 잘듣던!

돌사탕 하나는 나중에 엄마 갔다 드리고 '니 묵거라' 그러시겠지만.. 오늘 본 만화책 줄거리 얘기해 드릴 마음 (글은 몰라도 그림보고 느낀 게 거의 맞다고 했습니다) 에 신이나서 만화방 미닫이 유리문을 힘차게 밀어 부칩니다. '지아 왔더나?' 시집간 딸이 멀리 살아서 손주들도 자주 못 봐서 동네 아이들을 이뻐하시는 만화방 할머니 할아버지는 유독 저를 이뻐해 주셨습니다. 난하지않고 조용하고 심부름도 잘 한다고. 어릴 땐 꽤 착한 애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비말이 같지않고. 지아가 글은 잘 몰라도 어중간한 학교 갓 들어간 애들보다 낫다고 만화방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인정해 주신 능력, 글 몰라도 그림 잘 보던 애 였습니다.

아공~ 막내가 힘이 딸려 뒤쳐집니다.

'야, 이 반피같은 가시내야! 글도 모름시로 신간은 니가 왜 갖고 있노?' 한참 보고 있던 책을 빼앗아갔던 머리에 기계충있던 머스마한테 말도 못하고 눈물만 글썽한 체 우두커니 서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납니다. 이런 꼴 당한 걸 작은 오빠가 알면 한대 맞을 텐데.. '얀마, 만화를 글로 읽냐? 그림으로 보지!' 빼앗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 체 아쉬움에 혼자 속으로만 궁시렁댑니다. '야, 니 저 가시내 오빠한테 얻어맞는다 누군지 아나?' 작은 오빠한테 일러 바치면 한대 맞긴 하겠지만 지넘 머리통에 땜통 하나더 만들어 줄까봐 꾸욱 참아 줬더니만.. 잠시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할머니가 오셔서 '니가 좀더 기다리거라!' 시면서 책을 뺏아 주시면서 방안으로 저를 밀어넣습니다. 아직은 미취학 아동일 때 거의 매일 이런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저는 만화방 안채에서 고구마나 부침개 먹으면서 만화책을 맘껏 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빠오리가 왜 그런가 했는데

이런저런 세월이 흘러 아직도 그런날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데 언제 나는 이리도 늙어 할매가 되었을까? 나도 모르는 새 훌쩍 커버리고 늙어버린 시간들 속에서.. 언제 자라고 언제 피고 어느새 늙어 버렸을까를 생각하면서 어느 해 봄에 연못에서 만났던 오리 가족들을 봅니다. 단 한마리도 안놓치고 다 키워낸 엄마오리와 뒤를 지켜주는 아빠오리 그리고 착한 아기오리들을 바라보면서 언젠가 혼자 상상해 봤던 그런 세월속에 놓인 저를 만나기도 합니다.

비말 飛沫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