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짓는 여자

12월 31일이면 청개구리 자식들은

by 비말 2022. 12. 30.
320x100

 

12월 31일이면 청개구리 자식들은

죽은 후에 편안하게 누웠다고 '무에 그리 좋을거냐' 시며 내 품안에서 키운 내 새끼들 가고 나면 기억에도 없는 조부모 무덤가에 무슨 정성들이 뻗쳐서 손주들 계절 바꿔가며 꽃가지 꺽어들고 찾아와 풀 베고 절 하겠느냐 '죽어도 무덤속은 싫다!' 세월 지나 아파트를 짓고 새 건물들이 들어서면 파헤쳐진 무덤속의 뼈가 어느집 강아지 노리개 되어 뒹굴지도 모르는데 '그건 싫다' 시며 자식들이 토를 달을라 치면 무서운 말로 입을 막으시던 부모님! 살아생전 그리 의좋고 깨볶는 원앙짝도 아니셨건만 어찌 그 마지막을 원하는 소원만은 두 분이 똑 같으셨던지요.

 

 

십 이월 마지막 날, 갸냘픈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셨던지 겨울옷과 담요를 손으로 빨아 느신 후 물기 머금은 그것들이 고드름을 메달고 마른동태처럼 빨랫줄에 뻣뻣하게 메달려 있을 즈음 머리가 아프다시며 진통제 두알 드시고 잠깐 누웠다 '일어나마!' 시며 자리에 누우셨다는데 영영 못 일어나시고 뇌출혈이라는 병명 하나만 알려주시고 엄마는 떠나셨습니다. 당신이 늘 소원하셨던 것처럼 아주 조용히 자식들 맘고생 몸고생 시키지 않으시고 몇 시간만에! 그 날 종로통에서 친구들과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망년회를 보낼 계획에 언니 댁에서 종일내내 놀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식목일날 가신 아버지와도 한 해의 마지막날 가신 엄마와도 막내인 저는 마지막 인사를 나눠지 못했습니다.

 

 

막내딸은 박봉의 공무원한테 시집보내지 사업가한테는 절대 안줄거라셨던 엄마. 제 나이 스물부터 사모으시던 그릇들을 저는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막내딸 시집보내기 전엔 '눈도 못 감는다' 시더니 무에 그리 바삐 갈 일이 있으셨던지 자정을 알리는 쾌정이 울리자마자 곧 다시 깨어나기라도 하실 듯 얼굴주름까지 지우며 환하게 웃으시며 떠나셨습니다.

이듬해 봄 3월이면 회갑생신상 멋지게 받으실 텐데 겨우 육십년 세월 채우시느라 그 모진고생 험한 세상 다겪어 내셨던지~ 엄마 만큼만 살겠다던 저는 무슨 욕심에 낼모레 칠순을 계획합니다. 엄마보다 못 살 것 같다시던 맏이언니는 팔순도 중간을 넘기셨는데 저보다 더 이쁜 고운 얼굴에 늘 거울과도 친하시고 건강하시며 아들 셋 며느리 셋 손주 손녀들 다섯의 넉넉한 사랑도 받으시니 앞으로 백살도 거뜬하실 듯 합니다. 구십을 넘기신 형부가 요즘 많이 편찮으시긴 하지만요.

여자는 엉덩이가 무거우면 않되고, 남의 집에 갔을 때 안주인이 부엌엘 가면 함께 가서 얘기도 하고 일도 돕고 해야지 '손님 입네' 하고 다른 이들과 노닥거리고 있는 건 빵점짜리고 죽으면 썩어질 몸뚱아리 아끼느라 요리조리 일 무서워 피해 다니는 여자는 천하에 아무 쓸모없는 '망종이다' 시며 말의 높낮이도 없이 늘 조용히 지나는 말처럼 이르시던 '마늘 각시' 엄마는 하얗게 가른 앞가르마에 동백기름 발라 한 올 흐트러짐없는 쪽진머리를 양손바닥으로 만지고 또 만지곤 하셨습니다.

 

 

보일듯 말듯 사알짝 내비치던 이마의 파아란 실핏줄이 엄마의 강인한 성품을 보여주 둣~ '야무치' 라는 아명처럼 늘 부지런하고 척척 어떤 일이고 잘 해내시던 '콩쥐' 라고 내가 붙인 울 엄마의 다른 이름은 가끔씩 어린 저의 마음을 싸아하게도 만들었습니다. '법 없이도 살 양반' 이라는 심성을 가지신 외할아버지와 착하고 약아 빠지지 못한 세살 터울 오라버니, 엄마가 여섯살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어린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동네 사람들의 성화에 위로는 오빠 아래로는 팥쥐같은 여동생을 달고 들어오셨다는 새어머니.

당신에겐 너무도 귀해서 당신 키를 훌쩍넘겨 커 버린 두 딸들 설겆이도 시키기 아깝다시며 '이 담에 시집가면' 하기 싫어도 다해야 하니까 엄마하는 것 '잘 보고 제대로 배워라!' 시며 혼자 해내시고 남의 집에 가면 몸 아끼지말고 바지런하게 움직여 가정교육 잘못 받았다는 소린 듣지않게 하라며 말수가 짧으셨던 분이 그런 말만은 지치지도 않고 하고 또 하시고 참 자주도 하셨습니다.

 

 

엄마 길 떠나시던 날은 정초에 휴일에 진눈깨비까지 날리며 모든 것들이 마비되고 더디기만 하더니 백제화장터 화로에서 한 줌재로 되기까지는 '찰라가 그리 짧은 것일까' 싶을 정도 였습니다. 호상이라며 좋은 일 많이 하신 심성고운 분이시라 날씨도 부조를 한다며 덕담들 해댔지만

아버지를 보내드린 어느 산기슭에 엄마를 보내드리고 머리 파묻고 복받치는 울음한 끗 털어낼 무덤하나도 없는 청개구리 자식들은 오늘도 '개굴 개굴' 가슴으로 물기없는 빈울음만 삼키고들 있습니다. 1981년 12월 31일 엄마 먼 길 떠나시던 날~ 음력과 양력이 매번 뒤바뀌니 기일날 조차 시차에 흔들립니다.

오래전 글들을 다시 만납니다.

비말 飛沫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