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철길 시골 기차역
그 날도 오늘처럼 햇살이 곱던 1976년 시월의 어느 날,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모여든 친구들의 성화에 가족들까지 '다녀오지 그러냐?' 등을 떠미니 못 이기는 체 함께 떠난 가을 여행, 산도 들도 나무도 물도 함께 어우러진 그곳엔 기찻길옆 오두막집도 있었고 끝없이 뻗어나간 철로도 자갈깔린 철길 양옆으로 코스모스가 지들 맘데로 색깔대로 들쑥날쑥 흩뿌려진 듯 바람따라 하느작거리고 있었다.
갈 때는 왁작지껄 함께 간 친구들이 둘씩 셋씩 짝을 지어 낚시를 하고 더러는 옷을 입은 체로 물에 뛰어들어 뗏깔 고운 돌멩이와 고동도 줍고 혹은 돌을 주어다 아궁이를 만들어 때 이른 점심준비도 하고 끼들거리며 뭐가 그리도 즐거웠던지~ 요즘 같았으면 스맛폰 들고 카메라 들고 사진찍느라 난리 부르스들을 쳐댔을 텐데. 평소에 조용하던 한 친구가 코스모스 철길을 걷자고 어깨를 툭 치길래 두 처자는 코스모스 철길을 밭밑의 자갈 밟히는 소리들만 세면서 말없이 걷고 또 걸었다.
데레사님 따님께서 왕송호수에서
어머님께 카톡으로 보내주신 코스모스
말이 없어도 차고 넘칠 것 같은 시혼 (詩魂) 으로 온 가슴을 채우면서 얼마를 걸었던지.. 발 밑에 느껴지는 자갈들의 감각이 아픔으로 다가올 즈음 끝도 안보이는 철길 위에 나 혼자 버려져 있다는 것을 알아 채렸을 때는 이미 너무 멀리와 버렸고 때가 많이 늦어 있었다는 것을.. '야~ 이 미.친.년.아, 빨리 올라 타아~ 안 타?'
고래고래 악을 써대며 우악스럽게 달랑 들어 올리듯 내 몸을 차 안으로 끌어 올려 구석에 던지듯 내동댕이 치고는 '재수 더럽게~ 퉤!' 눈에 핏발이 선 남자가 창밖으로 가래를 뱉아낸다. 기차가 급정거를 하고 기관사 아저씨의 붉으락 푸르락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이 금방이라도 우악스런 그 손으로 내리칠 것처럼 보인다. 언젠가 들은 얘기로 기차는 웬만해서 급정거를 할 수 없다고 했는데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선잠을 자다 깨난 것처럼 머엉~
고개를 숙이고 몸을 외로꼬고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한 체 죄인처럼 앉아 끌려 (실려) 가서 맡겨진 곳이 조그만 간이역의 맘씨좋게 생긴 역장님께~ 모자를 벗어 다시 고쳐 써시며 살짝 웃으시는 그 분은 머리칼이 반백이 다 되신 60 가까이 돼 보이는 할아버지셨다. 짧은 시간 대충 설명을 하며 짐짝 내려놓 듯 나를 맡기고 뒤돌아가는 기관사 아저씨는 아직도 분이 안 풀려 식식거렸고 역장님은 '아가씨가 많이 놀랜 것 같네! 이쁘게 생긴 아가씨가 왜 그런 험한 생각을.. '자살, 내가?' 도대체 뭔 말인지. '야, 이.년.아. 뒤질려면 너나 뒈지지 누구 신세 망칠려고' 아까 그 기관사 아저씨가 악을 써댔던 말이.. '아~ 그 소리 였구나!' 혼이 빠져 나가고 너무 챙피해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조금 전까지의 상황, '내가 자살 미수자 였구나!' 그제서야 다리가 후들거리고 온 몸의 기운이 쫘악 빠져 나간다.
'아가씨 집에 연락이라도 하지? 곧 지서 김순경이 올텐데..' 작은 동네라 다들 잘 아시나보다. 이런 일을 사방팔방에 알려 공개 망신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혼자 해결해 보려 입 꼬옥 다문 체 버틴다. '뭔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험한 일은 면했으니 마시게나!' 주전자에서 물 한컵을 딸아 주신다. 이렇게 저렇게 얼래고 달래봐도 꿀먹은 벙어리. 역장님은 다음 기차가 올 시간이라며 밖으로 나가신다.
'으아악~ 이 무슨 꼴이람.. 진짜로 죽고 싶다!' 이 와중에 배는 또 왜 고픈지, 목도 마르고 입술은 바짝 말라 바스락 소리가 날 지경이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앉은뱅이 책상옆에 놓여있는 흙 묻은 흰고무신 한 켤레가 눈에 띈다. 그 구석엔 얼마나 오래 사용했는지 납짝하게 솔이 옆으로 드러누운 칫솔이 이가 나간 접시에 빨래비누와 함께 담겨있다. 흙 묻은 흰고무신과 비누 든 접시를 들고 냇가로 향한다. 마른 흙을 대충 털어내고 안창까지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칫솔질을 해댄다.
아까 내가 있던 곳과는 너무도 다르게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다. 햇살도 적당하게 내리쬐고 사방은 내 손 놀림에 튕겨져 나간 물소리만이 퐁당거리며 울려 퍼지는데 '이런 곳에 살고 싶다!'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 지 처지가 어떤 상황인지도 잠시 잊고 맘이 딴청이다. 여전히 평안한 얼굴의 역장님께서 '아가씨, 여기서 뭐해? 김순경 왔는데' 꼭 집에서 보호자가 데리려 왔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정답게 들린다.
1977년 여성지에 실린 글 (에필로그)
다음 편에서 계속
비말 飛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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