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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짓는 여자

그 날 보호실에서의 하룻밤

by 비말 2022.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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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보호실에서의 하룻밤

긴 나무걸상이 둘 마주보며 놓여 있을 뿐 소녀의 키를 넘는 창은 하늘 조차 보기 어려웠다. 쇠창살은 그나마 쇠를 채우고, 그 바깥엔 삼십을 훨씬 넘어 보이는 사내가 표정없는 얼굴로 신문 활자를 더듬는다.

그러다 가끔 고소한 듯 혹은 동정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 듯 신문으로 부터 눈을 떼고 창살 넘어로 소녀를 넘겨다 본다. 어린 아가씨가 이런데는 뭣하러 들어 왔느냐고 묻고 싶기라도 한 듯...

 

 

소녀는 갑자기 한기를 느낀다. 뚫어진 창 틈으로 10 月의 새벽 찬바람이 가슴을 파고 든다. '지금 쯤 하늘의 달은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겠지!' 얼음장 같이 차고 유리알보다 더 맑게 온세상을 비추고 있을 것이다. '아, 추워! 엄마' 낮부터 소녀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낮엔 조그만 머스마가 다 찌그러진 도시락을 철문 사이로 밀어 주면서 '점심인데 먹으세요' 고개를 도리질하며 먹고 싶지 않다고 하자 '이건 서에서 공짜로 주는 거예요. 먹어두세요' 하며 그냥 두고 돌아선다.

'저 도시락속엔 시커먼 보리밥이 꾹꾹 눌러 담겨 있을까, 아니면 콩만 잔뜩 삶아 넣은..' 교도소에서는 콩밥만 준다던 어릴 때 어른들의 얘기들이 문득 떠올랐다. 소녀는 벌떡 일어서서 도시락 뚜껑을 열어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사르르 눈을 감아 버린다. 짭짤한 액체가 입가를 적시고 흘러내린다. '아, 추워!' 주위를 둘러본다, 허나.. 덮을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위로는 흰색, 아랜 녹색으로 색이 바래 제 색을 구별해 내기도 힘든 벽엔 수 많은 사람들의 손 때가 묻어 더렵혀져 있었다. 핀이나 손톱으로 쓴 것인양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글들이 두서없이 널려있고 천정엔 불도 오지않는 백열전기 다마가 하나, 그나마 소녀를 조금은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딱딱한 긴 나무의자 둘 뿐이었다. 소녀를 감싸 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소녀는 철문 넘어의 사내를 주시한다. 하얀 안경알이 형광불 빛 아래 번뜩이며 가끔 귀밑 가까이 볼이 씰룩인다. 그가 앉은 의자는 쿳숀 좋은 회전 의자였다.  '난 죄인인가, 왜 나는 여기에 이러고 있는가?' 멍한 눈으로 천정을 보며 속이 쓰린 것을 느낀다. 불과 몇시간 전엔 나도 저 고고한 달빛을 받으며 코스모스 철길을 걷고 있지 않았던가? '누가 날 이 추운 곳에 있게 했는가?' 짭짤한 액체로 입술을 적시며 또 다시 눈을 감아 버린다.

머리속이 돈다. 빙빙 돈다. 찌그러지고 우그러진 동그라미들을 만들어 가면서~ 자꾸 돈다.

달은 지네.
소리도 없이 살구꽃 그늘
피릿소리가 새벽 하늘에 애달파..

 

 

언젠가 두꺼운 책장을 넘기다 외워둔 싯귀절이 생각나 맘 속으로 읊즈려 본다. 달은 지네. 소리도 없이 살구꽃.. 소녀는 살구꽃이 무슨 색깔인지도 확실치가 않다. 허지만 고갤 치켜들고 눈을 감으며 마음의 붓으로 물감칠을 해본다. 새벽녘 살구꽃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선 동네 어구 달은 소리없이 기울고 소 등에 올라앉은 댕기머리 땋은 처녀는 피릴 꺼내 문다. 삘릴리- 삘릴리- 새벽 하늘에 울려 퍼진다.

 

 

'춥지 않나?' 찌잉하는 벽의 울림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한 손엔 신문을 움켜 쥔 사내가 방석을 들고 철문 가까이 서있다. '자, 이걸 깔고 누으면 훨씬 나을꺼야!' 순간 서러움이 가슴을 친다. 온 종일 신발속에 꼬옥 끼워있던 발을 벗고 의자 위로 올린다. '자, 하나 더 가지고 길게 펴놓고 잠 좀 자도록 해! 내일 아침이면 나가게 될테니 너무 걱정말고' 하나는 깔고 하나는 가슴에 안은 체 두 다리가 가슴에 닿을 정도로 웅크리고 소녀는 잠을 청한다.

 

연신 짭잘한 액체는 입속으로 스며든다. '아, 따뜻해!' 어느새 코스모스 늘어선 철길가에 소녀는 앉아 있었다. 아무렇게나 놓인 돌멩이들이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지만 조금 옮겨 앉는 것으로 만족했다. 가을 빛 아래 코스모스는 부끄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수그린다. 찬 바람은 얇은 샤츠만 입은 소녀의 속살을 파고 든다. 으스스 소름이 끼친다. '아, 추워, 엄마..'

 

밑에 깔렸던 방석은 벽돌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고 가슴위에 얹은 방석을 힘주어 끌어 안으며 소녀는 더욱 몸을 웅크린다. 기울던 새벽달은 잠시 소녀가 든 방 쇠창살을 비좁고 들어선다. 그 빛에 소녀의 마른 얼굴은 아까 흘린 눈물이 말라 붙은 체 반짝인다.

 

1977년 여성지에 실린 글

 

 

손장순 (孫章純 1935~2014) 서울 출생

이화여고 졸업 후 서울대와 프랑스 소르본 대학원에서 현대 프랑스 소설을 연구했으며, 한양대학교 불어불문과 교수로 재직 (1969-1991)

 

1958년 ‘입상(立像)' 과 '전신(轉身)’ 이 김동리(金東里)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으로 데뷔. 장편 ‘한국인(韓國人)’, ‘세화의 성(城)’을 대표작으로 1969년부터 한양대 불문과에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 전후 한국의 문화 담론을 강타한 전후파 여성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

 

 

'부동산중개인(不動産仲介人), (현대문학.1965) 한국의 현대소설에서 아직 제대로 직업으로서의 인식이 되어있지 않은 부동산중개업을 표방하고 나선 한 젊은 남자의 애환(哀歡)을 그린 작품. 프랑스 문학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한국적으로 문화번역 (文化飜譯) 불문학자로서 실존주의 페미니스트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사상을 소개~ 번역본 '위기의 여자’ 와 단편 ‘우울한 파리와 ‘미세스 마야’ 등~ 1996년 한양대를 퇴임한 후 문예지 ‘라플륌’의 발행인 겸 편집자로 활동. 한국소설분과 협회·한국불문화협회·한국여류문인협회·국제펜클럽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최고위원 한국여류문학상, 국제펜클럽, 소설문학상, 유주현 문학상 수상. 2011년 서울대에 20억원 기부.

여성 작가로는 드물게 욕망의 핵심인 애증과 실존의 문제를 사회성짙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함께 치열하게 다뤘고 베스트셀러 '한국인, 공지, 세화의 城' 등을 통해 장편 작가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주요 작품: 심씨 일가의 사람들, 야망의 여자, 돌바람~ 영역본: 물 위에 떠 있는 도시 A Floating City on the Water~ 중단편 소설집: 대화, 불타는 빙벽, 절규, 도시일기~ 장편으로는 '작두'  외

* 아직 어릴 때는 손장순 작가님이 누군지도 몰랐는데 이런 분께서 제 글을 칭찬해 주셨다는 거에 괜히 가슴 설레던 그런 날도 있었습니다. 손장순 작가님 소개는 인터넷에서 빌려와 편집해 올렸습니다.

 

https://4mahpk.tistory.com/431

 

코스모스 철길 시골 기차역

코스모스 철길 시골 기차역 그 날도 오늘처럼 햇살이 곱던 1976년 시월의 어느 날,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모여든 친구들의 성화에 가족들까지 '다녀오지 그러냐?' 등을 떠미니 못 이기는 체 함께

4mahpk.tistory.com

 

이태원 참사 사망자님들과
그 가족님들께 마음으로 위로를 드립니다
어린 여성분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비말 飛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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