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스기빙 데이가 되면 애들과 함께 와 뒹궐기도 하고 애들 맡기놓고 여행을 가던 딸넴네는 4식구가 제각기 다 바빠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다는데 그만 먹어도 당장 기운쓸 일 없는 녕감 할매는 꾸역꾸역 뭔가로 자꾸 뱃속을 채우면서 지난 이야기들로 모자란 디저트를 대신합니다. 아침해가 동남쪽 하늘가에 얼굴을 내미는 시간.
뜨락 뽕나무이름이 웃기다면서 '봉봉봉' 하며 키들거리던 3살 손녀는 벌써 소녀티를 내면서 초딩생인데도 키가 거의 할미를 넘봅니다. 신기한 게 하는 짓이 제 엄마보다 저를 더 닮아있어 또 웃낍니다. 짝꿍 '그럴 땐 오드리랑 똑같으네?' 하며 신기해 하기도요.
전화로 손녀와 하던 대화를 떠올리며 만화 캐릭터 '일본에 미소녀 여전사 세일러 문 (Sailor Moon, 1992년)' 이 있었다면 그 녀가 탄생하기 30여년 전 경상도 통영에는 '쎄라 박' 이 있었다는 말에 넘편은 큭큭거리며 웃습니다.
서울간 언니가 선물로 보내준 푸른색 두터운 원피스에 하얀색 넓은 네모카라가 달린 세라복을 입고 나서면 동네 아지매들이 '쎄라야, 이뿌게 챙기입꼬 니 어디가노?' 그러셨던 기억이 벌써 또 60여년 전의 일 입니다. 예전 비말네 뜨락의 석류나무와 뽕나무가 맞짱뜨던 어느 가을 풍경사진 하나를 들여다 보며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캐냅니다.
고향 통영의 푸른바다와 하얀파도가 넘실대는 사이로 멍 때리는 늘근소녀는 만화책 캐릭터 하나 제대로 못 꿰고 있는 넘편한테 골 때리는 이바구로 정신을 흐려놓습니다. 공부만 죽어라 파고든 타입도 아닌데 만화책도 소설책도 별로 읽은 게 없다는 짝꿍을 놀리면서요. 부겐베리아 나무와 뽕나무 그리고 석류나무가 서로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내가 젤 잘 나가!' 척들을 해대던 어느 여름의 사진입니다.
키를 더 키우고 나이 한살더 보탠 손녀가 평균 사십년을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낸 할베, 할미의 아직도 콩글리쉬 (Konglish)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 '누가 그래?' 화를 벌컥냈던 일에 또 한번 웃습니다. 초딩생이지만 영어도 한국어 발음도 어눌해 진 우리들보다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대여섯살 때는 'Why? What? How?' 온갖 것들을 물음표로 종종거리며 따라 다니더니 의젓한 숙녀가 된 것 같습니다.
오드리 헵번을 아직도 최고라고 생각하는 할미가 지어준 이름도 아닌데 이름이 오드리가 된 손녀가 세일러 문이 됐던 원더우먼이 되던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키를 잘 잡아갔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아직은 젊은 부모들 마음은 그게 아닌 것 같아 마음이 좀 그렇기는 합니다.
콩글리쉬로 불러주던 할미의 노래를 키들거리고 듣다가 '그랜마 퍼니! (할머니 재미있어요) 또 해 보라며 재미있어 하던 작은 여식애는 할매의 오랜 이야기속 캐릭터들을 좋아하며 세일러 문 (Sailor Moon) 과 원더우먼 (Wonder Woman) 을 꿈꿔기도 하고 One the Woman의 꿈을 키워 나갑니다.
할베와 함께 뜨락에서 잘라온 뽕나무 줄기와 잎으로 할미가 닭과 함께 삶아내 요리조리 쿡을 해 맛나게 먹던 날들을 사진속에서 찾아냅니다. 비록 오늘은 지구별도 못 지키고 쪼그라진 쎄라 박이 케잌과 커피 한잔으로 새벽참을 챙겨내긴 하지만요.
* 세일러 문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나 에피소드가 있나요? 어릴 때의 기억들보다는 선명치가 않아 1992년에 탄생했다는 세라문에 대해 AI봇한테 물었더니 제게 도리어 질문하며 묻네요? 세일러문의 성씨가 '문' 인 줄 알았는데 '달의 공주이자 정의의 세일러 전사' 라는 걸 알고 한참 웃기도 했던 지난 날들을 떠올리며 웃기도 합니다. 한국이름 '문 세라' 가 아니고 일본만화 시리즈속 우사기 츠키노 (영어명: 세레나 츠키노) 라고 합니다.
세일러 문은 나오코 타케우치가 만든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 시리즈로 사랑받는 고전.. 그저 평범하기만 한 '우사기 츠키노' 라는 어린 소녀가 자신이 '세일러 문 (Sailor Moon)'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 세일러 문은 지구를 사악한 세력들로 부터 보호할 운명의 마법의 전사라고 합니다. 그녀도 벌써 30대 초반이네요. 만화속에서는 늙지도 않는 소녀이겠지만.. 60여년 전의 소녀 싸 박은 70을 바라보는데 말입니다.
비말 飛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