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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근소녀 일탈기

비말글방 비밀번호

by 비말 2022. 7. 16.

할머니 갖다 드린 점심 쟁반

누군가의 아침이 내게는 밤이 되고
다른 누군가들의 밤이 내게는 아침이 되는
지구 끝자락에 메달려 맴도는 시간들

 

녹두죽을 해먹고 남은 녹두로 숙주를 키워본다

초겨울 시린 발 동동거리며 댓돌위에 살짝
내디딘 발가락들 보다가 올려다 본 하늘 끝에는
그리다만 초선이 짝째기 눈썹처럼 삐뚤어진
조각달이 서러운 듯 냉기를 품어낸다.

 

계피빵도 구웠는데 빵은 안 드신단다, 백인 미국 할머니가.

사시나무 떨 듯 흔들리는데 '아니겠지?'
아마도 그건 내 맘 일꺼야, 우는 건지 웃는 건지
계수나무 둥근달 쪽배 탄 반달 초선이 눈썹달

 

씨없는 수박에 진짜로 씨가 하나도 없네?

초여름이 한 여름 되도록 이불짐 못 싸고
섣달 그믐밤 달그림자 찾아 헤메돌던 마음으로
새벽녁 찬기에 이불 끝자락을 당겨 안는다.
겨울인가 여름인가 맘끝이 살짝 시리네

 

야채값도 엄청 올랐다, 브로콜리 당근 사과 파 양파

혹여 내 맘 같을까 이부자리를 끌어다가
살째기 덮어주면 간 큰 남정네 '됐어, 안 추워!'
이불을 걷어낸다. '으랴?' 어디 두고 보자
기침하고 불쌍한 척해도 절대 안봐준다.

 

비닐 씌워서 냉장고에 넣어 뒀더니 참 잘도 자란다.

혼자 생뚱맞게 웬수 만들어 으르렁댄다.
내 팬(fan)인 듯 남편(husband)이 되어 자다가
봉창 두들겨대는 마눌(wife)때문에 새벽녁
된서리 맞으며 실눈떠고 껌뻑이며 한마디,
'그냥 컴퓨터 켜고 블로그나 하지!'

 

돼지고기 사다가 세 쪽씩 얼린 것 꺼내 삶고 굽고

살던 곳 떠나 헤멘 몇 달이 석 삼년같다.
칠순을 넘긴 남자는 인플란트 치아를 빼 놓고
백살도 넘긴 강쥐는 이빨없는 잇몸 드러내면서
으르렁대는데 갈 길 멀고 할 일 많은 여자는
비말글방 비밀번호에 비밀키를 꼿는다.

 

참 오랫만에 쿡을 한다, 혼자 사시는 동네 할머니께 드릴.

이사와 처음 사귄 96세의 백인 할머니는
보청기와 워킹체어 없으면 전혀 듣지도 걷지도
못 하시지만 내 말만은 다 알아들으신다.

짝꿍 왈, '한국말로 24시간을 함께 하는
나보다 더 잘 알아듣고 잘 통하는 것 같다?'
자기가 먼저 할머니 챙기면서 심통이다.

비말 飛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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