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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지 & 이벤트

인상 깊었던 책은

by 비말 2024. 12. 23.

올해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책이야 어떤 책이든 좋아서 펼친 건 늘 가슴을 콩당거리게 만들고 인상 깊은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한글을 모를 때도 만화책 그림이라도 맞춰면서 책은 좋아라 했는데 올해는 새로 구입해서 읽은 책은 없고 오랫동안 박스에 갇혀있던 책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읽은 1989년 13회 '李箱文學賞 수상작품집' 입니다.

1989년-13회 李箱文學賞-수상작품집
1989년 13회 李箱文學賞 수상작품집

 

첫번째 작가 김채원의 겨울의 幻 (환) 은 16페이지 간단한 작가 양력으로 시작해서 73페이지까지 깨알같은 작은 글씨로 색바랜 누런 종이에 박혀있어 돋보기가 아니면 그냥 개미가 기다말다 안간힘 써는 느낌이라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30여년 전만 해도 실눈뜨고도 돋보기보다 더 잘 들어왔는데 새월의 녹을 마이도 먹었나봅니다. 오늘도 밥상을 차리는 女子, 색바랜 편지를 들고 선 비말이.

김채원/ 1946년 경기 덕소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회화과 졸업/ 1975년 '현대문학' 에 '밤인사' 추천, 데뷔/ 작품집 '먼집 먼 바다', '초록빛 모자' 등.

밥상을 차리는 女子-16~73 페이지까지
밥상을 차리는 女子 16~73 페이지까지

 

*어린 시절부터 막 숟가락을 가지고 된장을 뜨러 어둠속 장독대를 다니던 여자이다. 그때부터 죽 밥짓고 반찬 하는 일들이 훈련되어 있다. 어머니의 말대로 격식있는 음식은 못한다해도 밥지을 줄도 김치 담을 줄도 모르는 여자는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 왜 이렇게 숨쉬기마저 곤란한가.

저는 그만 가져온 버선도 속치마도 입지 않고 오로지 살림과 싸우기에만 분투했지요. 이 괴물 같은 살림아, 어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라고 들러붙으며 저는 애꿎은 살림 쪽을 원망했습니다. (김채원/ 겨울의 幻 (환)/ 밥상을 차리는 女子/ 32쪽)

비말이 퓨전식-밥상을 위해-멸치똥 빼고
비말이 퓨전식 밥상을 위해 멸치똥 빼고

 

밤에 꾸는 꿈처럼 낮에 눈을 뜨고 꾼 꿈일 뿐이라고요.. 그 당시의 저는 어머니의 검버섯과 같은 칙칙함, 무미건조함에 젖어 있었으니까요. 밥상 위의 것들을 말끔히 남기지 않고 비운 후 텔레비죤 앞에 앉아 즐기는 그 즐거움이란 사실 내게 있어 허위가 아니었을까요.

아니, 이렇게 말한다면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거기에도 일상의 아늑함은 확실히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무엇보다 고마워했습니다. 이런 조용하고 아늑한 생활이 언제까지 가려나 스스로 조바심마저 쳐졌으니까요.. 인생이란 것이 이런 식으로 이렇게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것인가 하고 허망한 심정이 자주 되어졌습니다. ((김채원/ 겨울의 幻 (환)/ 밥상을 차리는 女子/ 38쪽)

89년 작가는 누구?-독자에게-다시 묻는다
89년 작가는 누구? 독자에게 다시 묻는다

 

이 글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더한 조바심 속에 있었습니다만 그런 모래시계 속에 저를 가두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이제 그런 힘을 얻었습니다. 누군인가 제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끝까지 기다려주었으면 하는 저의 소망의 마음을 이제 제 편에서 누군가에게 해주는 사람으로 자리잡은 때문입니다. 저는 굳건하게 여기에 섭니다.그것은 여자로서 서는 것일 뿐 아니라 할머니나.. 그 이전의 선조들이 전해준 마지막 인간의 조건으로서이기도 하지요.

내가 내가 아닌 날에도-나로 알아봐 줬으면
내가 내가 아닌 날에도 나로 알아봐 줬으면

 

몇 십년이 지났을까요. 어둠 속에서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 저는 당신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었고 자신있게 그 집을 가리킬 수.. 이제 한 자도 더 쓸 수 없도록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저는 조금 눈을 붙여 한숨자고 일어나서 아침을 지어야겠습니다. 그때 일어나서 들창을 열고 눈의 세계를 아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김채원/ 겨울의 幻 (환)/ 밥상을 차리는 女子/ 72-73쪽)

1989년-서울 막내 시누이-손편지가-애틋하고
1989년 서울 막내 시누이 손편지가 애틋하고

 

더는 읽을 수도 없이 작은 글씨들이 눈에 눈물까지 고이게하고 밑줄긋는 대신 돋보기를 써고 직접 타이핑으로 톡톡거리니 마치 원고지 백매를 탈고해 낸 마음이기도 합니다. 13회 李箱文學賞 수상작품집, 1989년에 아직은 서울에 있던 막내 시누이의 손편지와 함께 한 1989년, 그 해 김채원의 겨울의 幻 (환). 밥상을 차리는 女子, 비말이가 되어 새파랗게 젊었던 서른 중반을 엿보게도 됩니다.

비말네 겨울나기는-또 다른-밥상을 차리게하고
비말네 겨울나기는 또 다른 밥상을 차리게하고

 

티스토리 오늘의 블로그 완성하기 위해 종종 걸음치던 그 작심 삼주를 넘어서고 34일의 이벤트도 8일 남짓 남겨두고 있습니다. 시작한지 채 두 달도 않됐는데 벌써 오래전 일인 양 까마득하기도 합니다. '올해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말 그대로 그냥 '아, 이거다' 싶은 기억에 남는 책을 떵올려 봤는데 마침 그 책이 눈 가까이에 있기도 했네요. 겨울의 幻 (환) 에서 '幻은 변할 환' 이라고 합니다.

익숙해져 오블완 (오, 불안!) 아닌 오가블 (오늘도 가뿐히 블로깅) 을 합니다만 비말이 혼자만의 열심에 눈 짓무러실 맞구독친구님들께는 죄송한 마음입니다. 오늘도 라이센스없는 쉐퍼, 비말이의 소소한 밥상과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매분매초 심장의 고동이 기분좋게 울리셨으면 합니다.

비말 飛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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